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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혁명(1820~1870년)
    카테고리 없음 2022. 5. 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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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산업혁명의 시작

     1820년경부터 자본주의는 비상을 시작했다. 서유럽 지역 전체의 경제 성장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지고, 서유럽 파생 사회라 할 수 있는 북미와 오세아니아 대륙 등이 뒤를 이었다. 이 성장의 가속 속도가 너무도 극적이어서 1830년 이후 반세기를 우리는 산업혁명 시대라고 부른다.

     이 50년 동안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퍼센트 성장을 보였다.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기간 동안 일본의 성장률이 1퍼센트였으니 요즘과 비교하면 좋은 성적이 아니지만, 1500년에셔 1830년 사이에 0.14퍼센트 성장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경제에 터보 엔진을 달고 고속 주행을 한 셈이었다.

     1인당 소득이 눈부시게 증가했지만 이 시기의 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방직공 등 한물간 기술을 지닌 숙련공들은 임금이 더 싼 비숙련공들이 조작하는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잃었다. 이 비숙련 노동 인구에는 어린이들도 포함이 되었고, 심지어 일부 기계는 몸집이 작은 아이들을 염두에 두고 디자인되기도 했다.

    공장 또는 공장에 물건을 대는 소규모 작업장에 고용된 사람들은 장시간 노동을 각오해야 했다. 주당 70~80시간은 보통이고 100시간까지 일하는 경우도 흔했고, 쉬는 날은 일요일 반나절 뿐이었다.

     노동 환경도 최악이었다. 면방직 공장에서 나오는 먼지로 인해 영국의 수많은 방직 공장 종사자들이 폐질환으로 죽었다. 도시노동자들은 아주 밀집된 주거 환경을 견뎌야 했다. 한 방에 15~20명이 사는 경우도 흔했고, 화장실 하나를 수백명이 써야 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다. 이때 맨체스터 빈민가에 살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은 17세였다. 서기 1000년, 노르만 정복 당시 영국 전체의 평균 수명 24세보다 30퍼센트가 줄어든 수치이다.

     2. 반자본주의 운동의 발흥

     자본주의가 가져온 비참한 생활상을 생각하면 다양한 형태의 반자본주의 운동이 고개를 든 것도 당연하다. 이들 중 일부는 단순히 시간을 되돌리고자 했다. 러다이트 운동이라고도 부르는 기계화 반대 운동은 1810년대 기계화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은 영국의 숙련 방지공들이 실직의 직접적인 원이이자 자본주의 발달의 상징인 기계들을 파괴하면서 시작되었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또 다른 형태는 자발적 조합등을 통해 더 평등하고 나은 사회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웨일즈 출신 기업가 로버트 오언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동으로 일하고 거주하는 사회를 건설하려는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와 비슷한 형태이다. 그러나 반자본주의 운동가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혁명가로 일생의 대부분을 영국에 망명해 지냈고, 죽어서는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묻힌 카를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목가적인 공동 생활로 자본주의 사회를 대체할 수 있다고 믿은 오언과 그의 추종자들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접근법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칭하고 새로운 사회는 자본주의 성과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과 위에 건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폐지해야 하지만, 자본주의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대규모 생산 단위를 유지해 그 높은 생산성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거기에 더해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가 한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자본주의 기업처럼 운영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자본주의 기업이 기업의 운영을 중앙에서 계획하듯 사회주의에서도 중앙에서 경제 활동을 계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중앙 계획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와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은 자본가들이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리가 없으므로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자들이 이끄는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카를 카우츠키 등을 위시한 '수정주의자' 혹은 사회 민주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일부 마르크스 추종자들은 자본주의를 완전히 폐기 처분하기보다는 의회 민주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믿고, 노동 시간 및 노동 환경의 규제와 같은 정책과 복지 국가의 개발을 주장했다. 되돌아보면 수정주의자들이야말로 역사적 흐름을 가장 잘 읽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주장한 시스템이 현재 선진 자본주의 경제 국가들이 따르고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자본주위를 유지하면서 노동자들이 더 잘 살수있게 될지는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계획에 대한 자본가들의 저항이 맹렬했다. 1870년경부터 노동자들의 상황이 눈에 띄게 나아지기 시작했다. 우선 임금이 올랐다. 적어도 영국에서만큼은 생존에 필요한 생필품을 사고도 얼마간 여유가 있을 정도로 성인 평균 임금이 증가했고, 일주일에 60시간 이하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평균수명도 1800년 36세에서 1860년대에는 41세로 늘어났다. 이 기간의 후반부에는 복지 국가의 단초마저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 통일된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가 1871년 도입한 산업 재해 보험이 그것이다.

    3. 자유 시장과 자유 무역의 신화

     19세기에 서유럽 국가들과 서유럽 파생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한 것은 자유 무역의 확산 덕분이라고 보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다. 이 나라들의 정부가 국제무역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교역 활동을 제한하지 않았고, 더 넓게는 시장의 활동에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주위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은 자유시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 무역을 채택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보다 앞설 수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사실과 거리가 먼 주장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다른 서유럽 국가들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도 자본주의가 발달하던 초창기에는 정부가 선두에 서서 경제 발달의 지휘자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721년 영국 역사상 최초의 총리로 임명된 로버트 월폴은 광범위하고 야심 찬 산업 개발 프로그램을 도입하면서 정부 개입의 수위를 한층 더 높였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산업에 대한 괸세 보호와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영국이 18세기 후반 약진하기 시작한 것은 부분적으로 월폴의 이 산업 장려책 덕분이었다. 애덤 스미스가 영국 생산자들을 돕기 위한 보호주의나 기타 정부 개입이 필요없다고 주장한 것도 1770년대 영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너무도 월등히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영국이 완전히 자유 무역으로 방향을 튼 것은 그의 국부론이 나오고도 거의 1세기가 지난 1860년이었다. 바야흐로 산업 최강국으로서의 입지가 확고부동해진 다음이다. 당시 세계 인구의 2.5퍼센트에 불과하던 영국은 세게 제조업 생산량의 20퍼센트, 제조업 제품 교역의 46퍼센트를 자랑하는 제조업, 교역 강국으로 떠올랐다. 중국이 현재 전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15퍼센트, 교역의 1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과 비교하면 그 규모가 가히 상상이 갈 것이다. 중국 인구는 세계인구의 19퍼센트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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