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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혁명(1870~1913년)하이눈
    카테고리 없음 2022. 5. 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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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본주의의 성장이 가속화되다.

     자본주의의 성장은 1870년 즈음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860년대와 1910년대 사이에 새로운 기술 혁신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와 이른바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전기를 이용한 기계, 내연기관, 인공 염료, 화학 비료 등등이 그 예이다. 타고나 재주와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개발했던 산업 혁명기의 기술과는 달리 이 시기에 나온 기술들은 과학적, 공학적, 원칙들을 체계적으로 적용해서 개발된 것들이었다. 덕분에 어떤 기술이나 장치가 일단 발명되고 나면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서을 모방하고 혁신할 수 있제 되었다. 이와 더불어 대량 생산 시스템의 발명으로 인해 많은 산업 분야에서 생산 과정을 조직하는 방법도 혁명적인 변화를 거쳤다.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한 움직이는 조립 라인과 호환이 가능한 부품이 사용되면서 생산비가 극적으로 줄어 들었다. 1980년대 이후 대량생산 시스템이 종말을 맞았다는 주장이 많이 나왔지만, 이 시스템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생산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2. 생산규모의 증가와 위험부담, 불안정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제도 출현

     '하이눈'기간에는 유한 회사, 파산법, 중앙은행, 복지 국가, 노동법 등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자본주의 기초 제도들이 등장했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자본주의 발전의 저변에 깔린 기술과 정치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대규모 투자에 대한 수요가 점점 증가하자 이전에는 특권을 가진 기업에만 한정 허용되었던 유한 책임제가 '일반화'되었다. 다시 말해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하는 기업은 누구나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의 투자가 쏟아지면서 유한 책임 회사는 자본주의 발달의 가장 강력한 동력으로 부상했다. 자본주위를 칭송하는 사람들보다도 먼저 유한 책임 회사의 무한한 가능서을 감지한 마르크스는 이 제도를 '자본주의적 생산의 가장 발달한 형태'라고 불렀다. 1849년 영국이 제도를 개혁하가 전까지만 해도 파산법은 파산한 기업인을 처벌하는 데 중전을 두어 사업을 하다가 망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채무자가 감옥에 가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에 도입된 새로운 파산법에서는 기업운영에 실패하더라도 사업을 재정비하는 동안 채권자에 대한 이자 지불 의무를 면제해 주고, 또 채권자들이 채무의 일부를 삭감해 주도록 강제해서 파산한 기업인에게 제2의 기회를 주었다. 기업 활동에 따르는 위험이 훨씬 줄어든 것이다. 기업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은행들도 커졌다. 이와함께 은행 하나가 잘못되면 금융 시스템 전체가 흔들릴 위험도 증가했다.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설립되어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1844년 영국의 중앙은행이 된 잉글랜드 은행이 최초의 중앙은행이다. 노동자들이 열악한 상황 때문에 사회주의적 선동이 빈발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압력이 늘어나면서 1870년대에 들어서서는 산업 재해 보험, 건강보험, 노령 연금, 실업 보험 등 다수의 복지 및 노동 관련 법들이 제정되었다. 10세에서 12세 이하 어린이들의 고용을 금지하는 법을 다수의 국가들이 채택했고, 그보다 나이 든 아이들의 노동 시간을 제한하기도 했다. 노동 환경과 시간을 규제하는 법률도 도입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런 조치는 기사도 정신이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폄하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성과는 달리 여성은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 자신에게 불리한 노동 계약을 맺을 가능성이 높고, 따라서 그들 자신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런 복지 제도 및 노동법은 자본주의의 가장 극심한 폐해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했고, 빈곤층의 생활을 약간이나마 향상시켰다. 제도의 변화는 경제성장을 가져왔다. 유한 책임 회사와 채무자에게 우호적인 파산법은 기업 활동의 위험을 줄여서 부의 창출을 권장하는 효과를 낳았다. 중앙은행의 설립은 경제적 안정을 노동 및 복지법 제정은 정서적 안정을 강화해 투자를 장려했고 결과적으로 성장을 촉진시켰다. 서유럽의 1인당 소득 증가율은 1820~1870년에 1퍼센트이던 것이 하이눈 기간인 1870~1913년에 1.3퍼센트로 성장 속도가 가속화되었다.

    3. 자유주의적 황금기

     자본주의 하이눈 기간은 최초로 세계화가 시작된 때라고도 종종 거론이 된다. 처음으로 세계경제 전체가 하나의 생산 및 교환 시스템으로 통합이 되었다는 뜻이다. 많은 논평가들이 이 기간에 채택된 자유주의 경제 정책 덕에 재화, 자본, 노동이 별 정책적 규제를 받지 않고 국경을 넘나들었기 때문에 세계화가 가능했다고 주장한다. 또 국제 무대의 이러한 자유주의와 함께 각국은 국내 경제 정책에도 자유방임주의 정책을 사용했다고 해석한다. 기업 활동에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고, 정부가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수입만큼 지출을 하는 균형 재정을 목표로 동시에 금 본위주의를 채용한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1870~1913년 기간에 국제 무대에서 보편적인 자유주의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실제로는 자본주의의 중심지 서유럽과 미국에서는 보호 무역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났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이전보다 보호 무역을 더 강화했다. 1860년대와 1870년대에 FTA를 맺었던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는 보통 기한 20년이던 조약이 만료하자 재협정을 맺지 않고 관세를 크게 올렸다. 이 조처들은 부분적으로 신대륙과 동유럽에서 들어오는 값싼 수입 농산물로부터 농업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새로 시작한 중화학 공업을 보호하고 장려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새 보호주의'를 채택한 전형적인 나라가 독일과 스웨덴으로, 독일에서는 이 조치를 '철강과 호밀의 결혼'이라 불렀다. 독립 직후 맺었던 불평등 조약 기간이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만료하자 중남미 국가들은 30~40퍼센트에 이르는 상당히 높은 보호 관세를 도입했다. 그러나 그 외 다른 '주변' 지역들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던 강제적 자유 무역이 널리 확산되었다. 유럽 강대국들은 '아프리카 쟁탈전'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눈에 띄게아프리카 점령 경쟁에 열을 올렸고 다수의 아시아 국가도 식민지가 되었다. 말레이지아, 싱가포르, 미얀마는 영국 손으로 캄보디아,베트남,라오스는 프랑스로 들어갔다. 대영제국은 산업의 힘을 등에 업고 엄청나게 팽창해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이라는 유명한 말을 낳았다. 독일,벨기에,미국,일본 등 그때까지는 식민지 점령에 별 성과가 없던 나라들마저 이 대열에 끼어들었다. 이 시기를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르는 데는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핵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국내적으로도 정부의 개입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눈에 띄게 늘었다. 물론 재정정책에서는 균형 재정 원칙을, 통화 정책은 금 본위제를 채택해 자유 시장주의를 강력히 신봉하고 싫행에 옮기는 경향을 보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정부의 역할 또한 이 시기에 엄청나게 강화 되었다. 노동 규제, 사회 복지제도, 사회 기반 시설에 대한 공적 투자등의 분야에서 정부의 개입이 늘어난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적 황금기라고 일컫는 1870~1913년은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자유주의적이 아니었다. 핵심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국내외 정책을 막론하고 자유주의 경향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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