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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혁명(1914~1945년)파란의 시기
    카테고리 없음 2022. 5. 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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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차 대전, 자유주의적 황금기의 종말

     1914년 발발한 1차 대전은 자본주의 한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48년 유럽을 휩쓴 혁명, 1871년 파리 코뮌 등 빈곤층이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끊임없는 위기감과 1872~1896년의 장기 침체같은 경제적 문제 등에도 불구하고 대전 발발전까지 자본주의 상승과 팽창만을 거듭하는 듯했다. 1차 대전은 여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자본주의의 물결을 타고 전 세계적으로 상업적 상호 관계의 그물이 점점 더 촘촘해지면서 나라들 간의 관계가 너무도 복잡하게가 얽혀서 사람들은 1차대전 발발 직전까지도 전쟁이 터진다는 것은 극도로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고들 생각 했었다. 1차 대전의 발발은 어떻게 보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이눈 시기의 세계화가 시장의 힘이 아니라 제국주의 힘으로 진행된 탓에 주요 자본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언제라도 무력을 동반한 갈등이 되어 터질 수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한술 더 떠서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외적 팽창 없이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단계까지 진행되었고, 더 이상 팽창할 곳이 없어지면 조만간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주장까지 제기 되었다. 

     2. 러시아 혁명과 사회주의의 탄생

     위의 견해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이 자신의 저서 [제국주의론 :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에서 역설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 신봉자들에게 1차 대전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자본주의의 초석이 되는 모든 요소를 뒤엎는 경제 시스템이 혁명 후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후 10년 사이에 기계, 공장 건물, 토지 등의 생산 수단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이 폐지 되었다. 1928년 감행된 농업 집단화는 더 큰변화를 가져왔다. 클라크라고 부르던 제정 러시아 시대의 부농들 소유의 땅을 압수해서 국영 농장이 만들어졌고, 소농들은 이름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국영 농장이나 다름없는 협동 농장에 강제로 가입해야만 했다. 시장은 결국 폐지되었고, 제1차 5개년 경제 개혁이 시작된 1928년부터는 그 자리에 본격적인 중앙 계획경제가 들어섰다 1928년 당시 소련은 명백히 자본주의가 아닌 경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생산수단의 개인 소유, 이익 추구라는 동기부여, 시장 등이 없이 돌아가는 경제 시스템 말이다. 자유주위 또 다른 초석인 임금 노동 문제는 이보다 상황이 더 복잡했다. 물론 소련의 노동자들은 이론적으로 임금 노동자가 아니었다. 국유 혹은 조합 등을 통해 생산 수단을 모두 함께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본주의 경제의 임금 노동자들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기업이나 더 광범위한 경제 운영에 대한 영향력은 여전히 거의 행사할 수 없었고, 일상적인 노동 환경 또는 자본주의와 다름없는 위계적 관계에 얽매여 있었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거대한 경제적 실험이었다. 그때까지 어떤 경제도 중앙에서 세운 계획에 따라 운영된 적이 없었다. 마르크스가 상세한 부분을 아주 모호하게 언급하고 넘어갔기 때문에 소련은 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면서 일이 닥치는 대로 임기웅변식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카를 카우츠키를 비롯한 마르크스 주의자들마저 소련의 앞날에 회의적인 사람이 많았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경제에서 태어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 경제 시스템은 대기업과 대기업 카르텔에 의해 이미 고도의 계획 경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완전 계획 경제 시스템 바로 직전 단계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은 심지어 연방 내에서 좀 더 개발이 된 유럽 지역조차 자본주의가 거의 발달하지 않은 후진 경제로, 사회주의가 자연 발생적으로 태어날 환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소련의 초기 산업화는 큰 성공을 거두어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다. 이 성공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군의 동부 전선 진군을 막아 내면서 더욱 크게 주목받았다. 1928년에서 1938년 사이에 1인당 소득은 연간 5퍼센트 비율로 증가했다. 당시 다른 나라의 연간 성장률 1~2퍼센트와 비교하면 실로 눈부신 성장이었다. 사실 이 성장은 정치적 탄압과 1932년의 기아로 수백만명이 목숨을 잃은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기아의 규모와 심각성은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여서 많은 사람들이 소련의 경제 성적에 크게 매료 되었다. 특히 1929년 대공항으로 자본주의 질주에 제동이 걸린 상태였으므로 소련의 성공은 더욱 빛나 보였을 것이다.

    2. 1929년 대공항

     자본주의 신봉자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준 것은 사회주의 부상보다 대공항이었다. 특히 1929년 월가의 붕괴로 시작된 악명 높은 대공항으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미국에서는 더욱 그랬다. 1929년과 1932년 사이 미국의 생산량은 30퍼센트가 떨어지고, 실업은 3퍼센트에서 24퍼센트로 8배나 증가했다. 1929년 대공항 이전 수준의 생산량을 회복한 것은 1937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독일과 프랑스도 큰 타격을 받아 생산량이 각각 16퍼센트,15퍼센트 떨어졌다. 대공항에 대한 견해 중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퍼뜨려서 영향력을 얻게 된 것이 하나 있다. 문제가 크긴 했니만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정도의 금융 위기가 대공항이 된 것은 미국이 1930년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통과시켜 보호주의를 채택하면서 촉발된 '무역전쟁'으로 세계 무역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주장은 허점투성이다. 먼저 스무트-홀리 관세법으로 관세가 올라간 정도가 그다지 크지 않다. 미국 평균 산업관세를 37퍼센트에서 48퍼센트로 올리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이 법 때문에 대규모 관세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탈리아,스페인등 몇몇 경제약소국들을 제외하면 이 법이 채택된 후에도 보호주의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1920년 이후 국제무역이 무너진 주요 이유는 관세 인상이 아니라 핵심 자본주의 국가 정부들이 균형 재정에 집착하면서 벌어진 국제적 수요의 급락이라는 것이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다.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나 2008년 세게 금융위기 같은 거대한 금융위기가 벌어지고 나면 민간 부문 지출이 감소한다. 부채 회수가 잘 되지 않으니 은행들은 대출을 줄이고, 돈을 빌리는 것이 어려워지니 기업들과 개인들은 지출을 줄이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이들에게 재화와 서비스를 판매하는 다른 기업들과 개인들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다. 경제 전체의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정 수준의 수요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 주체는 정부밖에 없다. 정부는 들어오는 수입보다 더 많은 지출을 함으로써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재정 적자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대공항 시기를 풍미했던 균형 재정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인해 이런 정책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경제 활동이 줄어들면 세수도 줄기 때무네 정부가 재정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은 지출을 줄이는 길뿐이었고, 따라서 수요의 급강하에 제동을 걸 마지막 장치마저 쓰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설상가상으로 금 본위제로 인해 중앙은행은 자국통화의 가치 하락 우려 때문에 통화 공급을 늘리지 못했다. 통화 공급의 제한으로 대출은 더욱 더 어려워졌고, 그 결과 민간부문의 경제 활동이 위축되면서 수요는 더욱 줄어들었다. 1914~1945년 기간의 혼란은 2차대전 발발로 그 정점에 이르렀고 전쟁은 군인과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19세기 초 이후 가속적으로 증가하던 경제 성장률이 처음으로 역행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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