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산업혁명(1945~1973년) : 자본주의의 황금기
    카테고리 없음 2022. 5. 9. 19:43
    반응형

    1. 자본주의, 성장. 고용. 안정 모든 면에서 좋은 성과를 내다.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가 오기 전까지의 기간을 흔히들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역사상 가장 높은 성장률을 이루어 냈다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어울리는 명칭이다. 1950년에서 1973년 사이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연간4.1퍼센트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미국은 이보다는 느리지만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2.5퍼센트를 기록했고, 서독은 5.0퍼센트를 달성해서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일본은 이보다 더한 8.1퍼센트를 기록해 이후 반세기 동안 동아시아에서 일어날 '경제 기적'의 선구자가 되었다. 황금기에 이루어 낸 것은 높은 성장률만이 아니었다. 노동자 계층의 가장 큰 걱정거리인 실업은 서유럽, 일본, 미국과 같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이 국가들의 경제는 생산량, 가격, 금융 등 여러면에서도 무척 안정적이었다. 이전 시기에 비해 생산량의 부침이 훨씬 적었는데, 이는 경제가 하향 곡선을 그릴 때는 정부 지출을 늘리고 상향 곡선을 그릴 때는 지출을 줄이는 방식인 케인즈식 재정 정책의 공이 컸다. 물가 상승률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그에 더해 금융 부문의 안정성도 굉장히 높았다. 황금기 동안 은행 위기를 겪은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이와는 반대로 2000년 중반 몇 년을 제외하면 1975년 이후에는 매년 예외 없이 5~35퍼센트의 나라들이 은행 위기를 겪었다. 어느 기준으로 봐도 황금기는 놀라운 시기었다. 영국 총리 헤럴드 맥밀란이 '이렇게 좋았던 적은 예태껏 없었다' 라로 한 발언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던 이 같은 좋은 경제 실적의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 황금기를 이루어 낸 요인들

     일부에서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상업적으로 이용되기를 기다리는 기술이 선례 없이 많이 쌓여 있어서 황금기의 경제 성장에 추진제로 작용했다고 지적한다. 컴퓨터, 전자기기, 레이더, 제트 엔진, 인공 고무, 레이더 기술을 응용한 마이크로웨이브 등등 전쟁중 군용으로 개발된 수많은 신기술들이 민간 용도로 사용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이 기술들을 이용한 막대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전후 재건, 그 다음에는 전쟁 중 견뎌야 했던 내핍 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늘어난 소비자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황금기에는 또 경제 발전을 더욱 용이하게 만든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국제 경제 체제에 일어났다. 1944년 미국 뉴햄프셔주 브레톤우즈에서 회동한 2차 대전 승전국들은 전후 국제 금융 시스템을 주도할 두개의 중요한 기관을 설립했다. '브레톤우주 기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 두 기관은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더 잘 알려진 국제부흥개발은행이다. IMF는 국제수지 위기를 겪는 국가들에게 단기 자금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수지 위기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부터 받는 돈보다 그들에게 지불할 돈이 훨씬 많아 아무도 더 이상 그 나라에 돈을 빌려 주려 하지 않을 때 생긴다. 그렇게 되면 보통 금융 공항이 닥치고 심각한 불항이 뒤를 잊는다. 이런 나라들에 비상 대출을 해 줌으로써 IMF는 위기에 봉착한 나라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돕는 것이다. 세계은행은 '프로젝트 대출'을 위해 만들어졌다. 댐 건설 등의 특정 프로젝트에 쓸 돈을 빌려 주고, 민간 부문 은행보다 더 긴 상환기간 혹은 더 낮은 이자율을 제공하기 때문에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나라들은 더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 있다. 전후 경제 체제의 세번째 버팀목은 1947년 서명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이었다. 1947년에서 1967년 사이GATT는 '라운드'라고도 부르는 협상을 여섯 차례 주도해 주로 부자 나라들의 관세를 삭감하는 데 성공했다. 경제 발전 단계가 비슷한 나라들 사이에 관세를 삭감하자 시장이 더 넓어지고 그 결과 경쟁이 더 치열해지면서 생산성이 향상되는 긍정적인 효과가 생겼다. 유럽에서는 향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새로운 형태의 국제 통합을 위힌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움직임은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브르크 6개국이 모여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BCSC)를 만드는 것으로 시작해 로마 조약을 통해 1957년 자유무역 협정체인 유럽경제공동체를 경성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1973년 영국, 아일랜드, 덴마크가 유럽공동체(EEC)로 이름을 바꾼 이 공동체에 추가로 가입했다. 시장 통합함으로써 역사적으로 경쟁과 전쟁으로 얼룩졌던 유럽 지역에 평화를 가져온 EEC는 회원국들의 경제발전에 공헌을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황금기의 원인에 대해 가장 영향력 있는 설명은 경제 정책과 제도를 개혁해 혼합 경제 체제를 탄생시키고 운용했기 때문이라는 이론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섞었다는 의미이다. 대공항 이후 자유방임주이적 자본주의로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고, 규제되지 않은 시장의 결함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능동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와 동시에 2차 대전을 치르는 동안 실시되었던 경제 계획이 성공을 거둔 것을 목격한 후 정부 개입의 실효성에 대한 회의적인 태도가 많이 줄어 들었다. 또 많은 유럽 국가에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좌파 성향의 당들이 선거에 승리해 복지 국가와 노동권 보장을 더 강화했다. 정책과 제도에 나타난 이러한 변화는 사회적 평화 조성, 투자 촉진, 사회 이동성 중진, 기술 혁신 장려 등을 가능하게 해 자본주의가 황금기를 구가하는 데 공헌했다. 이 부분은 아주 중요하므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3. 자본주의, 리믹스되다.

     2차 대전 직후 유럽 국가들은 철강, 철도, 은행, 에너지등 주요 산업 분야의 사유 기업들을 국유화하거나 새로운 공기업 혹은 국영 기업을 세웠다. 생산 수단을 공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사회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신념을 반영한 것이다. 이 신념은 영국 노동당 강령4조에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스, 핀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등에서는 사기업들이 투자하기에 너무 큰 위험이 따르는 첨단 산업에 공기업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한 것이 황금기의 높은 성장률을 이루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많은 식민지들은 기본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화 전략을 추진했다. 그들이 따른 전략은 수입 대체 산업화전략이라 부르는 데 수입하던 제조업 제품을 자국이 만든 제품으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수입대체는 수입을 제한해서 더 강한 외국 경쟁자들로부터 국내 생산자들을 보호하고, 자국내에서 활동하는 외국기업들의 활동을 강력하게 제한하는 방법으등을 통해 추진 되었다. 자본주의 황금기 동안 정부의 개입은 부자 나라들의 국제 무역 부문만을 제외하고 모든 나라의 모든 부분에서 대단히 많이 늘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정부 개입에도 불구하고 부자 나라들과 개발도상국들 모두가 이전보다는 훨씬 높은 경제 성장을 기록했다. 곧 이야기 하겠지만 1980년대에 정부 개입이 상당히 줄어든 뒤로는 이 시기의 경제 실적을 능가한 시기가 없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자본주의의 잠재력이 정부 정책에 의해 제대로 규제되고 자극될 때 극대화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