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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업혁명(1973~1979년) : 과도기, 1980년~현재 : 신자유주의 흥망
    카테고리 없음 2022. 5. 9.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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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기는 1971년 미국이 달러-금의 태환을 중지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대공항을 겪으며 금 본위제가 거시적 경제 운용의 융통성을 방해한다는 인식에서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과거의 금 본위제를 폐지했다. 그러나 통화 체제는 여전히 궁극적으로 금에 근본을 두고 있었다. 다른 주요 화폐의 환율이 모두 미국 달러화와 고정되어 있었고, 다른 주요 화폐의 환율이 모두 미국 달러화와 고정되어 있었고 달러화는 금과 어느 때라도 교환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달러는 금이나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라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었다. 미국이 세계 총생산량의 절반을 생산하고, 전 세계계적으로 항상 달러화가 부족하며, 모든 사람이 미국 물건을 사고 싶어 하던 시절에는 충분히 타당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전후 재건기를 지나 다른나라의 경제들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이런 가정은 점점 근거를 잃어 갔다. 미국 달러가 금이나 다름없이 믿을 수 있는 화폐가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일단 깨닫고 나자 달러화를 금으로 바꾸려는 수요가 늘어났고, 이로 인해 미국의 금 보유고가 더욱 줄어들면서 달러화의 신용도도 더 떨어졌다. 1959년까지만 해도 금 보유고의 절반에 지나지 않던 미국의 공식 부채는 1967년에 금 보유고의 1.5배로 치솟았다. 1971년 미국이 달러화에 대한 금 태환을 폐기하자, 그 후 1~2년 사이에 다른 나라들도 자국의 화폐를 달러화에 고정 환율로 연동하던 관해을 폐기했다. 그 결과 세계경제는 불안정했다. 시장 분위기에 따라 화폐가치가 부침을 거듭하고 화폐의 가치가 상승 하락하는 동안 차익을 노리고 투자하는 환투기의 위험에 점점 더 크게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황금기는 1973년 1차 오일 쇼크가 닥치면서 종말을 고했다. 원유를 생산하는 석유수출국가기구(OPEC)의 가격 담합으로 인해 원유 가격이 하루 아침에 4배나 치솟았다. 1960년대부터 많은 나라에서 서서히 높아 가던 물가 상승률은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이보다 더 주목할 점은 이후 몇 년 동안 스태그플레이션으로 특징지어지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에 새로 만들어진 이 용어는 불경기에는 가격이 떨어지고, 호황때는 가격이 오른다는 오래된 경제학적 규칙이 깨졌음을 보여 준다. 대공항 때처럼 긴 불경기는 아니지만 경기가 나빠지는데 가격은 빠르게 올라서 1년에 10~15퍼센트, 심지어 25퍼센트의 물가 상승률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1979년 2차 오일 쇼크는 물가 상승률과 함께 영국, 미국과 같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정부들이 들어서는 결과를 낳음으로써 항금기에 진정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혼합 경제 모델을 비판하는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이때를 완전한 실패의 시대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오도하는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성장률이 황금기와 비교해서는 줄었을지 모르지만 1973~1980년 사이에 2퍼센트를 기록한 연간 1인당 소득 증가율은2차 대전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높았고, 심지어 신자유주위가 풍미한 향후 30년과 비교해도 약간 높다.평균 4.1퍼센트였던 실업률은 3퍼센트였던 황금기에 비해 높기는 하지만 그 차이가 그다지 크지는 않다. 그러나 이후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할 정도로 이 시기의 경제 실적에 대한 불만이 쌓이 것이 사실이다. 

     신자유주의의 흥망

    대처 영국 정부는 고소득자에 대한 소득세율을 낮추고 교육, 주택, 교통부문을 중심으로 정부 지출을 삭감하는가 하면, 농동조합의 권한을 줄이는 법안을 도입하고 자본 통제를 폐지했다. 대처 정부의 가장 상징적이 정책은 민영화였다. 국영 기업을 개인 투자자들에게 매각한 이 민영화 정책으로 가스, 수도, 전기, 철강, 항공, 자동차, 그리고 저소득층을 위한 공영 주택의 일부가 개인에게 팔려 나갔다. 또 물가를 잡기 위해 이자율을 올려 경기를 위축시키고 이를 통해 수요를 줄이는 정책을 썼다. 높은 이자율에 매혹된 외국 자본이 들어 오면서 영국 파운드화의 가치가 치솟아 영국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이 파괴되었다. 그 결과 소비자와 기업이 긴축을 하면서 1979년부터 1983년 사이에 깊은 불황이 찾아왔다. 실업자 수는 330만에 달했다. 제임스 캘러한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하에서 실업자가 100만 명 선을 넘어섰다는 점을 이용해 광고 회사 사치&사치를 고용해서'Labour isn't working'이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걸어 정권을 잡은 당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 아이러니하다. 이미 경쟁력의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영국 제조업계는 불황기 동안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맨체스터, 리버풀,세필드와 같은 전통 산업의 중심지와 북아일랜드 및 웨일스에 자리한 탄광촌들은 그야말로 황폐해졌다. 폐광 위기에 직면한 그림리라는 가상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영화[브래스드 오프]가 요크셔의 광산 도시 그라임프를 모델로 했다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기의 희열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멋진 신세계의 모든 게 안녕하지 못하다는 첫 번째 징후는 1995년 멕시코 금융 위기였다. 자유 시장 정책을 받아들이고 북미자유무역협정을 맺은 멕시코가 동아시아 국가들에 이어 기적의 경제 성장을 이룰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기대감으로 멕시코의 금융자산에 투자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새로 맺은 자유 무역 파트너의 경제가 파탄을 맞는 것을 원치 않았던 미국과 캐나다, 그리고 IMF에 의해 멕시코는 긴급 구제되었다.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가 터지면서 더 큰 충격이 들이 닥쳤다, 그때까지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시아 국가들, 이른바 'MIT'라고 부르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태국,한국의 금융 부문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타고 현실적인 수준을 훨씬 넘도록 가격이 오른 자산 거품이 붕괴한 탓이었다. 이나라들은 다른 개발도상국 지역들보다는 훨씬 조심스럽게 개방화를 추진 했지만, 1980년대말과 1990년대 초에 들어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금융 시장 개방을 감행했었다. 아시아 금융위는 해당 국가들에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1인당 5퍼센트 성장을 '불황'이라고 여기는 나라들에서 총생산량이 줄어든 것이다. 1998년 인도네시아의 총 생산량은 16퍼센트가 떨어졌고, 다른 나라들도 6~7퍼센트 감소했다. 2007년 초 '서브프라임'이라는 듣기 좋은 이름이 붙은 담보 대출의 채무 불이행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경종을 올리기 시작했다. 서브프라임은 미국 금융회사들이 집값이 계속 오를 것이라는 가정하에 안정적인 수입이 없거나 신용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갚을 능력 이상의 돈을 빌려 준 대출 상품을 말한다. 최악의 상황이 되더라도 집을 팔면 대출금은 회수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수천 아니 수십만 건의 고위험 담보 대출 상품들이 합성 금융상품으로 묶여 저위험 자산으로 팔려 나갔다. 처음에는 문제가 되는 미국의 담보대출이 500억 내지 1000억달러 정도로 추산되었다. 작은 액수는 아니지만 시스템에서 쉽게 흡수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2008년 여름, 베어스턴스와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진짜 위기가 닥쳐 왔다. 거대한 금융 공항이 전세계를 휩쓸었다. 금융계에서 가장 신망이 높은 화사들마저 석연챦은 합성 금융 상품을 만들어 팔고 대량으로 사들여 큰 위기에 처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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